지난 겨울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통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 오는 동안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지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면서, 정치와 심리적 안녕감과의 관계에 관해 좀 더 관심을 가져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관심을 공유하며 몇 편의 글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정치는 시민의 정신건강과 무관할까? 아니면 정치를 통해 우리는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단지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서,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삶의 질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진다. 흔히 정신건강은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고, 정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분리되어 다뤄진다. 그러나 최근 심리학과 정치학, 공공보건학의 융합 연구들은 이 둘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1. 정치란 무엇인가 – 시민의 삶을 규정하는 심리적 환경
정치는 법과 제도, 권력의 행사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시민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를 결정짓는 심리적 조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정부가 추진하는 복지정책은 단순한 예산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 각자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하다고 느끼는지에 직접 영향을 준다. 이는 자존감, 스트레스 수준, 미래에 대한 기대감 등 다양한 심리적 요소에 영향을 미치며, 결과적으로 정신건강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
2. 정치적 스트레스와 정서적 반응
정치적 사건이나 갈등, 예를 들어 탄핵 정국, 대규모 시위, 혐오 정치의 확산 등은 시민에게 감정적 충격과 정서적 피로를 유발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브라질, 헝가리 등지의 연구들에서는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시민들의 우울감, 분노, 무력감이 증가한다는 결과가 다수 발표되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권력형 비리, 국정농단, 연속되는 대형 참사에 이어 계엄 선포까지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은 집단적 트라우마이자 심리적 위기로 경험될 수 있다.
3. 정치와 자아효능감 –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심리학에서 자아효능감(self-efficacy)은 개인이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능력이다.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참여(투표, 캠페인, 시민 사회 참여, 기부, 집회 시위, 자원 봉사 등)는 이러한 자아효능감을 강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정치권의 부패, 권력의 독점,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제도는 시민의 정치적 효능감을 무력화시키고, 이로 인해 정신적 무기력과 냉소주의가 팽배해진다. 정치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는 곧 개인의 심리적 힘의 유무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4. 웰빙 정치와 심리민주주의의 대두
유럽과 북미에서는 이미 ‘웰빙 정치(well-being politics)’ 혹은 ‘심리 민주주의(psychological democracy)’라는 개념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이는 정치가 단지 법과 질서의 문제를 넘어서, 시민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접근이다. 덴마크, 뉴질랜드, 핀란드 등은 실제로 국민의 삶의 질 지표(주관적 행복도, 불안 수준 등)를 주요 정책 목표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접근은 시민의 정신건강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다.
‘웰빙 정치’는 시민의 주관적 행복, 심리적 안정감, 사회적 유대감을 중심 지표로 삼아 정치 시스템을 재설계하려는 시도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리처드 레이어드는『행복의 과학』에서 GDP가 아닌 국민의 삶의 질 지표(Life Satisfaction Index, Mental Health Index 등)를 정책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OECD는 이를 기반으로 2011년부터 ‘삶의 질 프레임워크’를 구축했고, 덴마크, 핀란드, 뉴질랜드 등은 이를 정책에 실질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한편 ‘심리 민주주의’는 미국 심리학자 데이비드 스몰러(David Smoller)와 정치철학자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 등의 논의에서 등장한 개념으로, 민주주의가 감정과 상호성, 회복력, 공감을 포괄해야 지속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길리건은 기존의 경쟁과 지배 중심 정치가 시민의 감정과 상호 돌봄의 윤리를 배제해왔음을 지적하고, 민주주의를 "관계의 윤리(ethic of care)"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접근은 단지 제도나 절차로서의 정치가 아닌, 시민 개개인의 심리적 안녕을 정치의 정당성 조건으로 삼는 전환을 의미한다.
실제로 뉴질랜드는 2019년 세계 최초로 ‘웰빙 예산(Well-being Budget)’을 발표하여, 청소년 자살률 감소, 정신건강 증진, 원주민 권리 강화 등을 국가 재정 정책의 핵심 목표로 설정하였다. 핀란드는 청년 고립 예방과 심리상담 접근성 확대를, 덴마크는 ‘정서적 만족도’를 정책 평가 기준으로 삼는 등 구체적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5. 한국 사회에서 왜 이 주제가 중요한가?
한국은 정치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지만, 정치에 대한 신뢰는 극히 낮은 사회로 평가된다. 시민들은 반복되는 정치적 피로와 냉소주의, 그리고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불공정에 대한 좌절과 무력감을 경험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현상이 아니라, 명백한 정신건강의 위기이기도 하다.
나아가 최근 계엄령 논의와 대통령 탄핵 절차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드러난 법치의 붕괴, 민주주의 원칙과 시스템의 훼손, 보편적 상식을 흔드는 극심한 혼란과 정치적 비정상성, 극단주의와 폭력성의 분출은 상식 있는 다수 시민에게 깊은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사회 전체의 공동체적 안전감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정치를 단지 소수 정치 집단 간의 정쟁이나 권력 투쟁으로만 보는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시민의 일상과 심리적 안녕을 실질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정치, 공동체의 정신적 건강을 지켜낼 수 있는 정치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하며, 지금은 그러한 정치로의 대전환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참고 문헌
- Bacevic, J., & McGoey, L. (2021). The politics of well-being: Citizens, states, and political responsibility. Critical Policy Studies, 15(3), 293–308.
- Fowler, J. H., & Christakis, N. A. (2008). Dynamic spread of happiness in a large social network: Longitudinal analysis over 20 years in the Framingham Heart Study. BMJ, 337, a2338.
- Kim, Y. H., & Park, S. M. (2020). Social trust in government and public compliance with policy during the COVID-19 pandemic in South Korea. Health Communication, 35(14), 1781–1787.
- Layard, R. (2005). Happiness: Lessons from a New Science. Penguin Books.
- Gilligan, C. (1982). In a Different Voice: Psychological Theory and Women’s Development. Harvard University Press.
- Smoller, D. (2018). Psychological Democracy: Reclaiming the Inner Life in a Disconnected Age. Beacon Press.
- Wilkinson, R., & Pickett, K. (2010). The Spirit Level: Why Greater Equality Makes Societies Stronger. Bloomsbur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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